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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도(金鼇島)

페이지 정보

작성자 공명 조회 292회 작성일 24-06-19 14:31

본문

 

섬이 자라모양이라 금오도金鼇島

금오열도 10개 유인도 중 모섬母島이다. 뱃길시절 여수百里, 서울千里라 했다​

면적은 833(27.48km2)여 만평1)으로 여의도(2.9km2)의 약 10배이고 국내 섬 중 30번째 크기다

 

인구(남면)는 1968년에 18,542명으로 가장 많았고 20232,728명(금오도 1,385명)2)이 살고 있다

거주 외국인도 137명으로 나타난다

금오도는 382m높이의 대부산과 344m의 망산을 양끝에 두고 구릉을 이루고 있다

금오열도를 방위로 나누면 가장 東斷이 동고지, 西斷이 용머리, 南斷이 솔팽이굴北斷이 화태리 치끝이다

섬의 西面은 깎아지른 단애(斷涯)로 풍광이 빼어나 여수10경 중 4경으로 꼽힌다

2021년 여수시 관내 10대 대표 섬 선정에서 오동도와 거문도를 제치고 1위로 뽑혔다

1981년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나 1448년에 인근의 경도, 묘도 등 전국 300여 곳과 함께 봉산封山으로 지정된다3) 1725년 주민의 입도와 경작이 허용된다4)

대부산(貸付山)은 일제 강점기 국유지를 민간에게 무상으로 빌려주어(19211931) 붙여진 이름이다5)

두포천은 벌목한 목재를 끌어내리는 용도로 조성된 것이라 전해진다

마전등(麻田嶝)은 삼()을 심었던 밭으로 예전에는 모하를 마동이라 불렀다

거리, 목화동, 마전등 지명에서 보듯이 두포는 뽕,목화,삼의 주산지였다

 

1885년 서당개설(심포마을)/1908년 우학교회 설립/1917년 남면사무소 설치

1921년 남면사립보통학교 설립(1924년 여남공립보통학교로 개칭)

1930년 여객선(짐부호) 첫 취항

1951년 여남고등공민학교/1965년 여남중학교/1984년 여남고등학교 개교

1959년 사라호태풍 내습


금오도 개척사에 등장하는 이주회는 대표적인 반민족 친일파로 명성황후를 시해한(1895.10.8.)자다

1895.11.14.사형이 선고된다6)

말년에 우학리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던 한국인 최초의 목사중 한분인 이기풍 선생은 1938년 일제의

신사참배반대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루고 1942년 생을 마감한다


2000년대 들어 금오도는 비렁길과 방풍으로 유명지가 되었다

2012년부터 18.5km에 이르는비렁길西面 단애를 타고 해안선가로 조성되어

2022년 기준 38만 여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았다

방풍은 생육조건이 잘 맞아 재배면적만 34만평에 달하는 전국 최대의 주산지다

또한 감성돔의 최대 산란지인 금오열도는 갯바위낚시 최적지로 꼽힌다

 

섬은 단절의 역사다

조정에서는 왜구와 해적의 침탈과 산림보호 등의 명목으로 수시로 공도空島정책을 폈다

살다 비우다의 반복으로 역사가 이어지지를 못했다 

하지만 기록된 것만 역사는 아니다

보대마을 등천의 수령 5백년 노송이 그 증표다

​                     

1),2) 여수시 유인도서현황 /공공데이터포털(행안부)

3) 조선왕조실록 세종30

4) 조선왕조실록 영조1

5) 디지털여수문화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6) 조선왕조실록 고종32

댓글목록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

애린 작성일

알지 못하니 궁금한 것이 없고

궁금하지 않으니 무심해지는 세상에,

세상에...

우리 금오열도의 역사를

이렇게 압축하여도

부동자세 문장이어도

너무 말랑하고 섬세하게

머리와 마음에 들어오는데요

게다가 참고 문헌 번호까지...

우리 고향이 더 멋있고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역시 공명님...감동입니다.

갑자기 세상이 맑아졌어요

감사합니다~~



 



향기님의 댓글

향기 작성일

우리 금오도의 역사를 한 눈에 볼수있게 

자세하게 설명 해주신 공명님 감사합니다~^^

남면의 인구가 1960년대에 가장 많이 살았네요~

현재는 모두 도회지로 나가서 살다보니 남면에 사는분들도 

얼마되지 않지만 고향을 지켜주고 계신 분들께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span class="guest">금오인</span>님의 댓글

금오인 작성일

반갑습니다. 공명님!

이렇듯 금오열도 곁가지는 물론 깊은 땅속 뿌랭기까지 자세히 들려주시니

고향홈 후배분들한테도 큰 공부가 되고 좋을것 같습니다.

뿌리를 모르고서야 사물에 대한 제대로 안다고 말할수 없지요.

공명님께서 칭하신 명성황후를 저는 민비라 부릅니다.

왜냐하면 조선을 망하게 하는데 일조한 만행에다

동학민란이 일어나자 청군을 불어 내려보냈고 

청군에 뒤질세라 일본군까지 나서 무려 오만 농민군을 몰살시킨 사건

어디 그뿐인가요?

양반자제들을 모아 신식군대를 만들고선 기존 군인들한테 월급도 못줄정도로 사치향락이 극에 달했단것

결국 임오군란이 터져 조선이 크게 쇠약해진 빌미가 되었지요

러시아쪽에 붙었다 청에 붙었다 서양에 잠깐 타진했다 요리조리 종잡을수 없었고.

아무리 시아버지가 밉기로서니 운현궁 골방에 감금 10년가까이 찾아보지 않았단점

자기 친족들과 함께 누구처럼 국고를 탕진해 나라를 거덜낸것 

만행이 끝이 없었지요.

어리버리한 고종을 대신해 권력을 좌지우지하다 결국 나라꼴이 우습게 되고...

고종과 민비를 보면 꼭 중국 서진사의 못난이왕 혜제와 악독한 왕비 가남풍을 그대로 빼 닮았다 봅니다..

자기 자식대에 나라가 망한것도 똑같고..

민비시해사건도 비록 친일파와 일본자객의 합작품이긴 해도

민비가 보낸 외국군인들에 산화한 무수한 동학농민군의 원혼이 그런거 아닐까요?

업보로 말입니다.

귀한 글 잘 보았습니다.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먼 훗날 후대의 사람들이 2024년도를 생각할 때

이렇게 뼈아픈 생각을 하지 않도록 중심을 잘 잡아야 하는데

가짜 뉴스의 다방면 가면은 너무 완벽하고

사유 하려는 의지는 너무 미약합니다.


그래도 금오인 님 같은 의식이 살아서 

녹두 장군님을 우리는 알게 되었지요.

그 당시 전라도 남자들은 적군에게 보이는 족 족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역사 공부를 통해 알게 되면서,

그러면 우리의 뿌리는 누구냐고 질문을 했는데요.

어떤 분 그러데요.

한 세대가 지나면 토종이 된다고요......


아이들이 왜 역사를 배우려고 하지 않는지, 말하기 전에

역사를 알면 알 수록 실망스러운 역사를 인식하고

역사가 말해 줄 것이라는 그런 무책임한 말은 

지금이라도 멈추었음 좋겠습니다.



<span class="guest">금오인</span>님의 댓글의 댓글

금오인 작성일

ㅎㅎ.. 이 글 또한 날라갈걸 어찌 아시고

미리 못질해 두시는 애린님의 슬기로움에 감탄..

그저 높이 평가 할수밖에요..ㅎ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작년까지만 해도 딴 동네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요즘 러브버그 때문에 여기 저기 칙~칙~ 소리가 나요.

내일 아침 베란다 방충망에 다섯 쌍 이상은 붙어 있을 텐데

얘네들이 모기를 참 좋아한다는 정보가 있어도

아~유~ 

이제 막 탄 지푸라기 같은 조각들이

허공을 떠도는 것 같아 정신이 없어요 ㅎㅎ


금오인 님

그러니까 저번에 날려버린 아까운 꼬꼬들~

언능 잡아오세요 ㅎㅎ

<span class="guest">금오인</span>님의 댓글의 댓글

금오인 작성일

그 꼬꼬는 미리님만 관심있고

다른분들은 금게에 뭔 저런걸 다 올린나냐? 할까봐..

나쁘게 보지 않으셨다면 다시 ^^

모처럼 오신 공명님 위대하신 글위에 떡 올려놓긴 뭐하고

내일 저녁때쯤 잠아 오리다..ㅎㅎ

<span class="guest">향기</span>님의 댓글의 댓글

향기 작성일

ㅎㅎ 맞아요~꼬꼬들 밑에

댓글 달았는데~  오~마이~갓~

나의 소중한 댓글도 함께 날아가 버려서 밤 새 기다리다 날 샛지유~~ㅋㅋ

양평블루베리 따러갓던 날에

지인들 다 자는데 살금살금

댓글 단 것인데~~아까비~ㅎ

<span class="guest">금오인</span>님의 댓글의 댓글

금오인 작성일

댓글이 있었음 안날렸을건데

못봐서...

암튼 미안하게 되었수디,.ㅎㅎㅎ

<span class="guest">공명</span>님의 댓글의 댓글

공명 작성일

1897년 10월 11일(음력) 조정에서는 민비에게 명성황후라는 시호를 내립니다

(조선왕조실록 고종34년 참조)

1885년 금오도 봉산해제설도 실록에는 없어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가급적 정사와 공적자료에 기초하였습니다

<span class="guest">미리내</span>님의 댓글

미리내 작성일

요녀석들 디게 소란스레 노는군

하시며 지켜보시다가

잠잠해지니까

초야의 거인들께서 한분 두분

나오시는군요.

아는 건 되 새기고

모르는 역사는 배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오아시스님의 댓글

오아시스 작성일

감사합니다

한눈에 금오도 역사를 알수있어서

늦은시간 읽고 또 읽어 내려갑니다


금오도의 역사를찾아서

다큐를 보는듯 시대별로 풀어주신 이야기에

푹 빠져듭니다


모하동, 마동의 내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금영김씨 시제를 모시는곳이 고흥이라고

알고있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친할머니를 닮아간다는 이야기에

고흥의 조그마한 섬(쑥섬)를

찾아가보기로 하고 세자매가 출발한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손녀,손자들이 궁금해할때

금오도를 자세하게 이야기해 줄듯합니다

다시 한번 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안개님의 댓글

안개 작성일

반갑습니다.

긍오도의 역사 감명 깊습니다.

두모에 살면서 

뽕, 목화, 삼이 주산지 인지도 몰랐습니다

목화를 심어 숨이불과 겨울 방한복을 지어입고

삼을 삼아 여름 이불과 삼베와 모시옷을 지어 

할부지와 할머님께서 곱게 차려 입고 생활 하시던 모습만 생각 날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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