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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종희 조회 425회 작성일 24-01-26 08: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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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이종희

           

어디선가 들려오는 전자음 소리에 무심하다가 한참만에 소리를 따라 베란다에 나가보니 세상에~! 빨간 에러코드를 반짝이며 세탁기가 멈춰 있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아찔한 멘붕이 부풀었다.

그 속에는 하필 한파 주의보가 한창인 날, 무슨 생각에 빨지 않아도 될 옷가지를 잔뜩 넣고 돌리다가 이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내 연달 없는 자책도 포함되었다.


세탁기의 이상 반응을 진즉부터 감지하고도 별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고,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인가 싶어, 서둘러 세탁기 속에 갇힌 빨래부터 꺼내고, 이리저리 작동 버튼을 눌러보지만, 역시나 요지부동이다.

 

잠시의 고민도 금방 풀려 두 개의 선택 중 하나를 버리고 집 근처 대형 매장으로 갔다. 그런데 새로운 세탁기가 우리 집에 도착하려면 이틀이 걸린다는 직원 말에 어정쩡한 웃음만 새어 나온다.


세탁기를 너무 오래 사용한 데다가 서비스를 불렀을 때 마모된 부품으로 소요되는 시간과 수리비 등 부정적인 요소만 잔뜩 나열하며 선택한 건데, 결국 해결되지 않는 만족만 달랑 매달고 집으로 돌아왔다.


베란다 귀퉁이에 철퍼덕 주저앉아 있는 빨래의 무게는 장난이 아니다. 일단 반만 덜은 빨랫감을 대야에 나누어 욕실로 옮긴다. 옷들이 어찌나 무거운지 욕실 의자에 앉아 빨래를 헹구는 내내 아이쿠! 하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온다. 편리에 익숙해진 몸이 자꾸만 멈추겠다는 의욕을 끌어올리느라 게으른 거품을 낸다.


그 옛날 우리 엄마는 돌담 건너편 댓잎이 아침 햇살에 달라붙어 방문 창호지 화면에 그림자놀이를 하기 전에 빨래통을 이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러고는 한참 단잠에 빠져있는 우리를 부르셨다. 항상 급한 엄마는 단번에 내 이름을 부른 적 없다. 종. 충 .정 . . .여수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는 오빠만 빼고 우리 남매 '앞' 자만 불러 놓고 엄마는  또 어디론가 총총히 사라지셨다. 


이불속에서 이리 뒤적 저리 뒤적이다가 깨어있으면서도 자는 척하는 동생에게 빨래 널로 나가자고 흔들었다. 우리 동생은 역시나 엄마를 닮아서 단번에 내 말을 따르지 않는다.아 ~안~해~ 시~이~러~ 나는 두어 번 정도는 사정하지만, 더 이상은 부르지 않는다. 뒤늦게 동생이 방문을 열고 가까이 다가와 턱밑에서 부스스한 두 눈을 깜박거려도, 나는 못 본 척 씩씩 거리다가 혼자만 힘이 든다. ㅎㅎ


하지만 대부분 우리 자매는 환상의 콤비다. 돌아가신 대형 문어같이 축 늘어진 윗도리 양 끝을 붙잡고 서로 어긋나게 비틀어 짜는 일은 정말 둘이 아니고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 


우리가 널어둔 빨래가 공중에서 영하의 기온을 만나는 날은 빨래도 완전히 울트라급 깁스를 하는 날이다. 젓가락 같은 가느다란 고드름을 일제히 매단 옷들은 그대로 멈춰라~!의 마법에 걸려 내가 한쪽 팔을 툭 치기라도 할라치면 우두둑 소리를 내며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았다. 녹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옷은 엄마 손에 이끌려 가마솥뚜껑 위에 풀어졌다가, 안방 아랫목에 누어 노곤했다가, 무사히 우리의 옷이 되어주었다.


자연스레 떠오른 옛 시절이 내 엄살을 쥐어박는다. 호강에 겨운 나태에 마음이 찔려서 나머지 빨래까지 후련하게 끝낸다. 탈수되지 않은 겨울 빨래가 공기 멈춘 베란다에서 마르기는 얼마나 벅찬 일인지,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도 가벼워지지 않은 옷을 만지며 새삼 깨달았다.


세탁기는 다행히 일찍 배달해 달라는 내 부탁을 들어준 덕분에 첫 배송 번호를 얻었다. 그런데 세탁기가 물류 창고에서 오랜 날 떨다가 왔기 때문에, 바로 사용하면 벨트 등 여러 부속에 무리가 갈 수 있으니, 내일쯤 사용해야 한다는 배달 기사님 당부가 이어졌다. 온도에 의한 무리라면 베란다에 가득 찬 오전 햇살에 뜸 들이다가 오후에 사용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내 생각을 그대로 밀어붙인다. 덕분에 건조대에 물먹은 채 이박 삼일을 견딘 빨래는 다시 헹구어지고 탈수되었다.


내가 불편해지는 것만 생각하다가 13년 동안 몸 바쳐 헌신한 세탁기에게 그동안 고마워다는 말 한마디 못 하고 떠나보냈다.


내 삶에 집중하다가 허투루 넘긴 이별식이 어디 세탁기에게만 있었을까. 너무도 가까이에서 알게 모르게 나의 온기가 되어준 모든 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어쩌면 주위 모든 분들이 듬직한 세탁기가 되어준 까닭에 내 안락은 삑삑 소리를 내며 덜컹거리다가도 다시 힘을 내 돌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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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span class="guest">미리</span>님의 댓글

미리 작성일

세탁기 호스가 얼어서 에러 든건 아니었나요?
호스에 뜨거운 물 몇 바가지 부으면 되던데 ^^
종희네 세탁실에서 화장실로
그리고 서고지까지 갔다가 오느라
애 쓰셨구만요 ㅋ

난 빨래 하면 어린 시절 사촌 동생이 우리 집에 왔는데 어린애가 환경이 바껴서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겨울 밤 솜 이불과 요에 쉬를 하였지요 그것도 매일 밤.
어른이나 아이나 그 옆에 안 자려고 하여 늘 내 옆에 같은 이불 덮고 자는데
이불을 빨 수 없으니 또 어차피 젖을것이니 아침에 우리 엄마는 그 무거운 요 이불 널어 말려 저녁이면 또 덮으라 주는데 그 냄새며
젖은 내 옷은 또 ~~얼마나 힘들었었는지 지금도 그 기억은 날라가질 않네요.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어머나 세상에 ㅎㅎ
아이고~ 사촌 동생님 꿈나라에서
물을 많이 드셨을까요

호수의 잘못은 아니고
제가 너무 많이 부려먹었어요
탈수할 때마다 자꾸 몸이 뒤틀렸는데
많이 노후된 부속과
용량 초과 무게를 못 견딘 거라고 추측해요
물젖은 겨울옷 꺼내면서
제가 반성 좀 했습니다 ㅎㅎ
그리고 이 글에는 뺐지만
세탁기 놓는 곳이 안쪽에 있어서
왔다 갔다 자리 미리 확보해 두느라
우리 집 화초가 좀 들썩였죠 ㅎㅎ
배달 기사님 너무 좋아하시데요

<span class="guest">이수영</span>님의 댓글

이수영 작성일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ㅎㅎ
덕분에 새로운 세탁기 나쁘지 않네요^^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사실은 12월 한파 때 있었던 일인데요
몇일 전 어떤 분과 통화하다가
"너무 추워 빨래가 얼었습니다"
그 말씀에 깜박 잊었던
그날을 소환했습니다.
덕분에 글 하나 건졌는데
감사인사 드려야겠네요~^^
세탁기 돌릴 때마다 일던 근심이
흘러갔습니다.ㅎㅎ

<span class="guest">콩심이</span>님의 댓글

콩심이 작성일

눈만 껌벅거리고 있는 동생
너무 슬펐겠습니다 ㅎㅎ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그러니까요 ㅎㅎ
치사하게 굴면 저는 좀 못봐줍니다.
그래도 우리 동생 덕분에
덜 외롭게 살아갑니다~♡

<span class="guest">백 명희</span>님의 댓글

백 명희 작성일

이사와서 분주하게 지내다 보니 안좋은 허리병이 도져서 핫빽하고 누워 추억깃든 빨래 이야기에 너무 반갑고 소싯적 살아온 기억이 주마등처럼
뜨 오르는군요
추운날 세탁기 고장에 이렇게 가족들 과의 추억도 새겨보는 계기가 되는것이 고장난 세탁기도 참 좋은일 하고 가는것 같애요 ㅎㅎ
얼마 남지 않은 방학 행복하게 지내시고 또 만 나요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에구 이 추운데 이사하시느라
고생 많으셨겠네요
정말 빨래에서 해방 되면서
그 빈 시간 우린 또 밖의 일을 채우느라
참 바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글 쓰면서 생각 못했던
엄마 일이 떠올랐어요.
그 많은 일 때문에 빨래는
새벽에 다 하셨다는 것을요...
어서 빨리 쾌차하시고
건강하게 만나요~♡
감사합니다 ~♡

<span class="guest">솔향채</span>님의 댓글

솔향채 작성일

평상시에는 언제나 함께한 세탁기가
고장이 나거나 전기가 정전이던가 할 때면 새삼 세탁기의
소중함을 실감한다.

세탁기를 생각히니 아찔했던 때가 뇌리에서 다시금
상기된다.

여수를 가려고 이것 저것 준비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세탁실쪽문을 닫을려고 하는 순간 바닥이 물바다가되어 출렁출렁
세탁가에로 들어오는 수도꼭지 호수가 터져서 난리가났다.
바닥이 나무바닥에다 거실로 들어오면 그야말로 대형사고다
그대로두고 여수에 나갔다가 2박3일 일정으로갔다와야하는데
간만의 차이로 발견되어 세탁실바닥물을 쓰레받이로 부지런히 퍼내서 다행이 나무바닥도 무사했다
연신 하나님감사합니다를 외쳤다.

빨래감을 한 다라니씩 이고 마을공동 빨래터를 다녔던
우리네 부모님들 고무장갑도 없던시절
뜨거운물 한주전자씩 손에들고 호호불며 ~~

세탁기 발명하신분께 감사하네요
어디 세탁기 뿐이겠어요
모든 전자제품덕에 편안한 세상~~
재미난 글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세상에 큰일 날뻔하셨네요
며칠 고향도 많이 추웠지요?
윗녘은 좀 풀려 외출이 편해졌어요
정말 세탁기 발명 후
워킹맘이 많이 늘었다는 이야기를
그 언젠가 미디어를 통해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네요.
오늘도 즐겁게 보내시고
감기 조심하세요~♡

<span class="guest">김희숙</span>님의 댓글

김희숙 작성일

추억의 단편 소설같은 예쁜 글 속에 풍덩 빠졌습니다
세탁기의 중요성과 미안함 모두 사람냄새 나는 님의 숨결 입니다
오랜 세탁기는 누구나 생명을 다 한다음에야 바꿀 생각을 하죠
그런데 어느 날 수명 다한 세탁기를 보내려고 하는데 아들녀석이
엄마 세탁기가 불쌍해요. 우리랑 함께 살았는데 고장 났다고 버리면 안되잖아요 하면서 굵은 눈물 흘릴 때 안아주면서 모든 이별은 슬프다는걸 설명해주던 순간이 올라오고 그 시절 옷에 달린 고드름도 바지랑대를 내려 따먹던 추억도 소환해봅니다
지금도 엄마는 옹기 그릇에 옥양목 어른들 빨래 동네 우물가에서 빨아 집에 이고 오면 얼어버린 빨래 널던 말씀하며 시집살이 얘기 종종 합니다
그 시절 어머니들의 고생이 지금의 등걸처럼 휘어지고 굽은 손 입니다
우리의 문명은 더욱 발전해서 세탁기 없는 세상에 살아갈지 모르지만 사람의 감성만은 사람 냄새에 고이 배지 않을까요
공리님의 글 읽고 깊이 사유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챙김 할줄안다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삶의 흔적이라 생각 합니다
다시 또 고향마을로 여행 떠나고픈 마음의 꿈틀거림 솟아
납니다. 제게 있어 금오도의 추억은 그푸른 물결 바람소리
휘어진 길목마다 아름다운 풍경들 놓치고 싶지않은 자산 입니다
늘 건강 하시고 예쁜 마음 ,감동적 포토 에세이 기대 합니다
사랑합니다♡♡♡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문우님 답글이 더 빛나요
읽는 내내 뭉클해서
읽고 또 읽고...
시간 내서 한번 뵈어야지 하면서도
해가 바뀌었네요
늘 건강 조심하시고
우리 또 파이팅 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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